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두 얼굴의 여성, 영화 ‘길복순’이 말하는 정체성과 선택의 서사

by itmirae-movie 2025. 4. 2.

길복순(2023) 영화 관련 사진

‘길복순’은 한 손엔 칼을, 다른 한 손엔 도시락 가방을 든 ‘킬러이자 엄마’라는 이중의 삶을 살아가는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정체성과 선택, 그리고 가족이라는 주제를 액션 장르에 접목시킨 독창적인 작품이다. 주인공 복순은 냉혹한 킬러로서의 완벽함과 동시에, 싱글맘으로서의 불안과 갈등을 동시에 끌어안으며, 관객에게 인간 존재의 복합성과 삶의 방향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장르적 쾌감과 정서적 공감이 교차하는 이 영화는 단순한 액션 이상의 서사를 품고 있다.

킬러이자 엄마, 양립 불가능한 삶의 교차점

영화 ‘길복순’은 시작부터 명확한 대비를 그려낸다. 복순은 의뢰만 들어오면 누구든 완벽하게 처리하는 업계 최고의 킬러다. 냉정하고 침착하며, 언제나 100%의 성공률을 자랑한다. 그러나 카메라가 시선을 돌리면, 그녀는 고등학생 딸을 키우는 싱글맘이다. 도시락을 싸고, 학교 상담에 참석하며, 딸의 감정 기복과 사춘기를 받아내야 하는 ‘평범한 엄마’의 삶 역시 그녀의 또 다른 현실이다. 영화는 이 두 세계를 날카롭게 병치시키며, 정체성의 균열 속에서 살아가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단지 킬러와 엄마라는 직업적 정체성의 차이가 아니라, 보호자와 파괴자, 삶과 죽음이라는 이분법적인 가치가 그녀의 하루 속에 공존한다는 설정은 매우 도전적이다. 그리고 그 설정을 따라가며 관객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함께 품게 된다. 복순은 딸에게 자신이 하는 일을 숨긴 채 살아간다. 그러나 점차 감정의 간극은 깊어지고, ‘진실을 말하지 않는 보호자’로서의 한계가 드러난다. 특히 딸이 자신만의 삶을 찾기 시작하면서, 복순은 ‘완벽한 킬러’보다는 ‘불완전한 엄마’로서의 자기 인식을 점점 받아들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삶의 선택이라는 주제를 전면에 내세운다. 단순히 직업의 선택이 아니라, 관계의 선택, 삶의 방식에 대한 선택이다. 복순은 단 한 번의 선택으로 삶의 방향을 바꾼다. 그녀가 살인을 거부하는 그 순간, 세계는 그녀를 적으로 규정한다. ‘길복순’은 이처럼 선택이 곧 정체성이 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으며, 이를 통해 인간 존재의 다면성과 불확실성을 드러낸다.

 

장르를 넘어선 여성 서사의 확장과 힘

‘길복순’은 장르적으로는 액션 누아르에 가깝지만, 그 속에 담긴 서사는 매우 정서적이며 철학적이다. 영화는 액션 장면마다 명확한 의미를 부여한다. 단순히 박진감 넘치는 장면으로서 소비되지 않고, 복순의 감정 변화, 가치 판단, 인간적 고뇌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그녀가 칼을 들고 싸울 때마다, 그 안에는 ‘지키기 위해 싸우는가, 아니면 벗어나기 위해 싸우는가’라는 질문이 담겨 있다. 이는 단순한 서사의 전개를 넘어서, 관객에게 인물의 내면을 함께 체험하게 만든다. 영화는 또 하나의 대조 구조로 ‘회사’라는 조직을 보여준다. 킬러들이 소속된 회사는 체계적이고 정교하게 움직이며, 복순의 능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복순의 선택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녀가 단 한 번 지시를 거부했을 때, 회사는 그녀를 적으로 돌린다. 이 구조는 현대 사회에서 여성에게 요구되는 ‘역할 수행’과 그것을 거부했을 때의 대가를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회사 내부의 인물들 역시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겉으론 유능하고 세련되지만, 속으로는 폭력과 위선, 경쟁과 배신이 얽혀 있다. 이들이 복순과 대립하면서 드러나는 갈등 구조는, 개인이 조직 안에서 얼마나 쉽게 소모될 수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묘사한다. 딸 재영과의 관계는 또 하나의 중요한 서사 축이다. 복순은 딸에게 ‘모범적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늘 죄책감과 두려움이 자리한다. 진실을 말하지 못한 채 살아온 세월의 무게가, 딸의 성장과 함께 복순을 점점 옥죄어 간다. 결국 영화는 폭력보다도 감정, 관계, 정체성의 파열음을 통해 진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길복순’은 단순한 킬러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그 끝에는 인간 복순의 이야기가 남는다. 그녀는 조직에도, 가족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스스로의 삶을 선택해야 하는 존재이며, 이 모순이야말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질이다.

 

정체성의 균열 속에서 태어난 진짜 이름

‘길복순’이라는 영화는 액션과 드라마, 철학과 감정이 교차하는 입체적인 작품이다. 주인공 복순은 단순히 강한 여성 캐릭터가 아니라, 복잡한 내면을 지닌 인물로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끝없이 시달린다. 그녀의 선택은 명쾌하지 않다. 정답이 아니라, 스스로 감당해야 할 책임의 무게로 가득하다. 그러나 영화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주체성이 발현된다고 말한다. ‘보호’는 단지 누군가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고 선택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메시지가 영화 전반을 관통한다. 복순은 결국 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진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그것은 살인 기술도 아니고, 조직의 인정도 아닌,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진심을 전할 수 있는 삶이다. 영화는 마지막까지 그녀에게 뚜렷한 해답을 주지 않지만, 그녀가 싸우고 걸어가는 길 자체가 곧 해답이라는 암시를 남긴다. ‘길복순’은 한국 영화에서 드물게 볼 수 있었던 여성 중심 액션영화이며, 동시에 여성의 정체성과 사회적 역할에 대한 섬세한 통찰을 담은 작품이다. 정체성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선택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오늘날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시대적 메시지를 품고 있다. 또한 이 영화는 부모와 자식, 개인과 조직, 진실과 거짓이라는 대립 구조를 통해 우리 삶의 다양한 갈등을 은유적으로 비춰준다. 결국 ‘길복순’은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나는 지금 어떤 얼굴로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나의 삶을 선택하고 있는가? 그리고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은 누구인가? 이 영화는 그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주기보다, 함께 고민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 고민은 스크린을 넘어, 관객 각자의 삶으로 이어진다. 바로 그 점에서 ‘길복순’은 오래도록 기억될 수밖에 없는 영화다.